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카테리나 2세 (문단 편집) ==== 계몽전제군주 ==== >'''국민이 군주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군주가 국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중략) 군주 정치의 진정한 목적은 백성들로부터 그들이 타고난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선에 이르도록 그들을 올바로 이끄는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주의 관련 서적들을 꽤 좋아했고, [[몽테스키외]], [[볼테르]]와도 여러 번 서신을 교환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여기에 감명을 받아 [[계몽주의]]적 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상황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제헌의회를 소집하고 법전을 제정하고자 했으나 2년 만에 제헌의회를 해산시키고 만다. 각 계층의 반대가 너무 심했던 것이다. 특히 지주들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제한될까 봐 더욱 심하게 반대하였다. 1764년에는 [[정부]] 중 한 명인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시켰다. 이로서 예카테리나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즉위 후 스타니스와프 2세는 예카테리나에게 반발했고, 결국 재침공해야 했다.] 한편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을 숙적이라고 여겼고, 1768년부터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때의 오스만 제국은 쇠퇴기에 접어들었지만 국력은 여전히 강해서 러시아로서도 이기는게 쉽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계속되던 1773년, [[예멜리얀 푸가초프]]라는 농민이 반란을 일으켰다. 푸가초프는 자신을 '''[[표트르 3세]]'''라 칭하며 엄청난 위세로 반란 범위를 넓혀나갔다. 이 난을 '''[[https://en.wikipedia.org/wiki/Pugachev%27s_Rebellion?wprov=sfla1|푸가초프의 난(1773년 ~ 1775년)]]'''이라 부른다. 하지만 진압군에 의해 이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후 예카테리나 2세는 [[농노]]의 의무는 늘리고 귀족들의 권리를 강화하며 농민들을 억압했다. 사실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군주를 자처했고 꿈꿨던 이상은 그 당시의 유럽 군주들보다도 더 급진적이었으나, 근본적으로 지지계층이 지주 중심의 귀족들이었기에 이런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현실은 시궁창]]. 물론 이것도 러시아 특유의 사회현실과 괴리가 있는 급진적인 이상을 강력히 추진한 예카테리나의 잘못이라 볼 수 있다. 게다가 푸가초프의 난 이후 농노제를 개악시키고 민중을 억압한 것 때문에 계몽사상가들에겐 [[폭군]]으로 비난받았으며, 죽을 때까지 러시아 민중들에게 증오를 받았다.[* 오죽하면 소련 시절에 그녀의 이름을 딴 "차리친"은 반동 전제군주의 이름을 쓰는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소련 공산당에 의하여 "스탈린그라드" 라고 이름이 바뀌었으며, 스탈린이 죽은 뒤에는 오늘날의 [[볼고그라드]]로 명칭이 다시 변경되었다.][* 스탈린의 선임인 [[레닌]] 또한 예카테리나 2세를 인민을 억압한 악랄한 반동 전제군주라고 격렬히 매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